서오릉(西五陵)
일시 : 2025. 5. 24. 토요일. 흐림
서오릉 남원골 추어탕에서 가족들과 점심을 먹고 7년 만에 서오릉 경내를 걸었다. 집에서 보통 걸음으로 20분이 안 되는 거리인데도, 눈에서 그리 가깝지는 않았나 보다. 생각이 나를 키우고 만들며, 사물을 보게 하는 것이다.
아비의 업보를 지고 꽃다운 스무 살에 종생한 의경세자. 산맥보다 더 듬직한 아버지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특히 해서에 능했다. 그러나 철이 들고 세상 이치의 전후를 가늠할 정도가 되자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날이 갈수록 악몽의 강도가 세어진다.
" 이노옴! 네 아비가 저지른 악행만큼 네가 받아라."
세조는 아들의 시신을 안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자식을 가슴에 담고 명당을 찾아 나섰다. 아비의 업장을 대신 지고 떠난 아들의 무덤을 위한 세조의 노력은 광적이었다. 세조는 이미 조선 초 내노라하는 풍수의 대가다. 아버지 세종의 왕릉을 잡으러 다녔고, 형인 문종의 능 그리고 이제는 자식의 무덤마저 잡아야하는 기막힌 팔자다. 후일에는 며느리의 무덤에까지 관여했던 것이 세조의 풍수 팔자다. 택지 천거가 봇물처럼 쏟아지자, '상중하로 구별하여 올리라' 는 어명과 함께 통행 계획을 짜서 친히 현장 답사를 한다. 고르고 골라 조성된 것이 경릉이다. 서오릉은 세조가 마련한 세조 혈통의 선산 왕릉이다. 동구릉 지역과 맛먹는 55만평의 서오릉이 만들어지게 된다. 경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 가장 소박하다. 병풍석, 무인석이 없다. 아담한 민간 무덤 같다. 장식을 버리고 편안하게 잠들라는 교훈같다. 자식이 무슨 죄인가. 세조의 피울음이 흥건히 녹아 무덤을 쓰다듬고 있다.
- 마애종 사랑에서 퍼옴 -
서오릉이란 조선 왕조의 다섯릉 즉 경릉, 창릉, 익릉, 명릉, 홍릉을 일컫는 말이다. 오릉 이외에도 명종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의 순창원이 경내에 있고, 영조 후궁 영빈 이씨(사도 세자의 생모)의 수경원이 있으며, 최근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의 대빈묘도 이곳으로 이장 되었다. 서오릉은 우리나라의 여러 왕릉 중에서 동구릉 다음으로 왕실의 족분을 이루고 있는 사적지(사적 제 198호)이다.
↘ 종합안내도
↘ 경내 들어와 명릉에서
숙종(1674-1720)과 그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제 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쌍분으로 되고 인원왕후의 능은 옆에 따로 있어 같은 언덕에 배치된 형식이다. 숙종은 현종의 아들로 태어나 현종8년(1677) 세자로 책봉되었고 예론이 한창 일어나 장희빈을 중심으로 한때 인현왕후 민씨를 몰아낸 사건을 겪었으나,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등 업적을 남겼다. 인현왕후 민씨(1667-1701)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태어나 숙종 7년에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숙종 15년 왕자 균(뒤의 경종) 책봉 문제에 장희빈의 무고로 폐위당하였으나, 후에 장희빈이 몰락하면서 복위된(1694)뒤 35세로 승하하였다.
숙종의 아버지 현종은 효종의 외아들이었고, 숙종 본인은 현종과 정실 부인인 명성왕후 소생의 외아들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정통성으로 꿀릴 것이 없는데,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외척과 관련된 트러블도 전혀 없었던 덕분에 부계와 모계 모두 완벽한 정통성을 타고난 왕이었다. 숙종의 막강한 왕권은 왕위에 오를 때 어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완벽한 정통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수경원에서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원이다. 영빈 이씨는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를 낳았으며 영조 40년 69세로 승하하였다.
↘ 익릉에서
숙종의 원비 인경황후 김씨(1661-1680)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서 현종 12년(1671)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숙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 6년(1680) 경희궁에서 20세에 승하하였다.
↘ 익릉과 순창원 사이 산책로에서 갈참나무 어린싹이 뽑혀, 그것을 아내와 아이들이 살리고,
↘ 소나무 길 · 서어나무 길 갈림길에서 가족들을 기다리며
↘ 서어나무 길로 올라가며 아내의 주특기 점프 샷
↘ 창릉 가는 서어나무 길에서( 조선의 길은 예쁘다)
↘ 창릉에서
8대 예종(睿宗, 1450~69)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1498) 한씨의 능이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19세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불과 14개월의 짧은 재위기간 동안 남이(南怡)의 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치적 격동을 겪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은 세조의 승하를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세조 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1469년 승하했다.
안순왕후는 장순왕후의 뒤를 이어 세자빈이 되었다. 창릉은 동원이강의 형식을 이루고 있으며, 석물의 배치는『국조오례의』의 예에 따랐다. 왼쪽이 예종릉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인순왕후릉이다.
↘ 홍릉에서
조선 21대 영조(1694-1776)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1692-1757)능이다. 정성왕후는 1704년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과 혼인했고, 병약하고 후사가 없던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하자 왕비에 올랐다.
영조는 왕비의 행장기(行狀記)에서 정성왕후가 43년의 왕궁생활 동안 늘 미소 띤 얼굴로 맞아주고, 윗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생모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시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고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묏자리를 정하면서 능 오른쪽(바라보아 왼쪽)을 자신의 자리로 잡아놓으면서 쌍릉으로 예상하여 배치해놓았으나 영조 승하 후 정조는 영조의 능을 완전한 길지라고 주장하는 지금의 원릉 자리(동구릉)에 정했으므로 홍릉은 이처럼 한 쪽에 빈 채로 남아 있다.
영조가 원래 자신의 자리로 정해놓았던 자리는 비어 있고(우허제右虛制) 그 앞으로 석물이 놓여 있다.
↘ 대빈묘에서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禧嬪, ?~1701) 장씨의 묘이다. 희빈 장씨는 어려서 나인으로 궁에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1688년 왕자 윤(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숙종이 송시열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윤을 원자로 책봉함에 따라 내명부 정1품 희빈에 올랐다. 그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었고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1694년 서인들의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계기로 남인이 옥사를 일으켰으나 숙종이 오히려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을 재집권시킨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그해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다. 1701년 민비가 병으로 죽자,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아 사약을 받았다. 숙종은 이후 빈을 비로 승격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원래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장사지냈는데, 1969년 이곳으로 옮겼다.
↘ 경릉에서
덕종(추존)과 비 소혜왕후(추존) 한씨의 능이다. 덕종은 세조의 원자로 태어났으나 20세에 돌아가시고(1457) 뒤에 그의 아들 성종이 즉위 하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 한씨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로서 월산대군과 성종형제를 두었으나 성종이 즉위한 뒤 왕비로 추존되면서 소혜왕후라 일컫게 되었다.
유일하게 조선왕릉중 왕과 왕비의 능의 배치가 바뀌었다. 왼쪽이 소혜왕후 능이고, 오른쪽이 덕종의 능이다.
↘ 순창원에서
명종(1545-1567)의 원자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묘소이다. 순회세자는 명종 1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에 승하했고, 공회빈 윤씨는 윤옥의 딸로서 선조 25년 (1592년) 3월 3일 승하했다
14:42분에 서오릉 경내에 들어와 17:41분에 나왔으니 세 시간을 걸은 것이다. 시간은 왜 이리도 빠르게 흘러가는 것인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며 느끼는 것은 나뿐이가? 이제는 흐르는 시간도 여백으로 비워두는 지혜를 담아 두어야겠다.
↘ 집에 들어가 저녁 먹기는 조금 일러 서삼릉 젖소개량소 초지에 들러
↘ 서삼릉에서 집으로 가면서 바라본 삼각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