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레일 시절/신탄리·창동역

신탄리역

一切無 2024. 10. 4. 23:36

 

1982년 5월 어느 날 용산 교통공무원 교육원에서 철도 공무원 시험을 응시하였다. 

당시 안창화 청장님이 시험장에 독려하러 오셨다. 시험에 합격하고 임용되는데 1년 9개월이 걸렸다. 그나마 나는 동기생들 중에서 일찍 발령이 난 것이다. 신탄리역에서 전근할 때 내 후임으로 동기생 김중일이 발령받아 왔으니.

이유는 당시 공무원 정년 연장인지, 인원 감축인지 오래되어 가물가물 거린다. 하여튼  교육은 세 번 나누어 받았다. 나는 1기로 교육을 받았고, 교육이 끝난 후 동기생 모임을 하였는데 (한정섭 회장, 김옥균 총무) 몇 년 유지를 하다 모임이 시들해지면서 사라졌다.

   

 

 

↘ 초임발령 전 직무교육 중 청평역에 들러  역직원들의 근무상황을 견학하고 청평유원지에서(1982. 6)

 

     철도고등학교를 졸업생 다섯 명과 같이 직무교육을 받았다. 학생장은 철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전성근을 학생담임이 지명 하였다. 당시 교육생 중에는 후일 지하철 노동조합 위원장을 지낸 배일도 씨도 있었다.

 

 

 

 

 

첫 출근을 하려고 새벽 4시에 일어나니 둘째 여동생은 밤을 꼬박 새우고 내 조끼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 조끼를 입고

수원역까지 걸어가 성북행 첫 전동차를 탔다. 성북역에서 신탄리행 동차를 갈아타고 신탄리역에 내리며 대합실 개찰구에서 인사한 조명행 역무원과 역무실로 들어감으로써 나의 30년 6개월의 철도생활이 시작되었다.

신탄리역 근무는 1984.02.15. 발령받아 그해 철도청장 특명에 의하여 11.16까지 근무를 하고 떠났다. 짧은 생활을 하였지만 첫 근무라는 인연으로 포근한 고향 같은 곳이다.

당시 직원 구성은  역장, 부역장, 매표담당 2명, 화물담당 2명, 특수일근 1명으로 갑을반으로 나누어 24시간 격일제 근무,

특수 일근은 한 달 근무하고 순환하였다. 주변엔 대한통운 소장, 합숙 사감, 수부, 식당 아주머니, 재향군인 공제(동차 청소 용역) 5명, 겨울이면 동차 예열원 2.  주변엔 관공서는 신서초등학교만 있었다. 

열차(동차)는 1시간 간격으로 운행(열차가 진입하고 출발하는 20분이 지나면 40분의 여유시간이 있었다.) 일요일과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승객들이 없는 한산하고 여유로운 역 생활을 한 곳이다.

 

1. 합숙 승무원 숙소를 한 곳을 배정받아 생활하였다.

2. 물이 얼마나 센지 머리를 감으면 뻣뻣하였다.

3. 밥은 광장 맞은편 역전식당에서 세끼를 먹었다.(한 끼에 500원, 합숙은 300원)

    

 

 

 

 

↘ 신탄리역 역무실에서(84. 3. 30)

    나는 이곳에서 매표를 하고 그 후로 매표 업무를 하지 않았다. 

 

 

 

↘ 1984. 6

일 년에 두 번 시행하는 체육행사 시 봄 행사로 전곡역에서 버스를 타고 ○ ○ 민통선을 들어갔다. 당시 신분은 공무원이었고, 신탄리 파견 군 보안대 책임자의 영향으로 민통선에서 하루를 오붓하게 즐겼다.

최봉희 선배님과는 역전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자주는 아니지만 약주를 하였다. 당시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었던 세 사람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세 사람 다 수원에 사는 사람들이다. 당시 신탄리 국민학교 선생님은 화서아파트, 최봉희 선배님은 정자동 나는 서문아파트에 살았다. 그래서 유독 친밀하게 지낸 것 같다. 나는 거리가 너무 멀어 합숙에 방을 얻어 기거하였는데, 최 선배님은 출퇴근을 하였다. 선생님은 학교 관사에서 기거.

 

 

 

 

 

민통선을 흐르는 임진강에서

 

 

 

↘ 1984. 7.  역사에서 

 

 

 

담당자 팻말에 "최성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열이가 사진을 촬영해 준 것 같다. 성열이는 1기 동기생으로 나보다 3달 늦게 신탄리역에 발령을 받아 근무하였다. 나는 고향이 예산 대흥이고, 성렬이는 당진 신평이며 나이도 동갑이라 친밀하게 지내며 지금까지 관계를 유지한다.

 

 

 

 

 

 

↘ 고대산을 배경으로(비번날 종종 산책코스)

    수원에서 종복이가 소식도 없이 왔다. 근무 날이라 제복을 입은 상태에서 이곳저곳을 다녔고, 종복이는 집이 멀어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떠났다.

 

 

 

 

 

 

당시 성북역 - 신탄리역을 운행하던 동차에서

 

 

 

 

↘  승강장에서 바라본 신탄리 역사 (1984. 11)

내가 11월 16일 까지 근무하고 다음날 창동역으로 전근을 갔으니 기념으로 촬영한 것 같다. 전근하기 전 날 송별식을 하였는데 얼마나 술이 취하였는지 아침에 성열이가 걱정이 되어 약을 사갖고 와 먹여 주던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향우(동차 청소용역) 가리봉아주머니 잘해준 것도 없는데 담배 두 갑을 사주고 간 기억도 새롭다. 16년이 지나 가족들과 신탄리역을 갔었는데 역전식당 주인도 바뀌었고, 가리봉 아주머니도 떠난지 오래 되었다.

 

 

 

 

 대합실 문 사이로 보이는 가게가 경일상회(역 사무용품은 이곳에서 구입)

 

 

 

↘  동기생 성열이와

 

↗ 역 횡단 통로에서 바라본 대광리역 방면이다. 당시는 완목식 출발신호를 사용하였던 시절이다.  우측 건물은 내가 생활한  승무원 숙사, 

 

 

↘ 경원선 철도중단 (당시는 신탄리역이 종점)을 배경으로 . 북쪽으로 300m 지점에  "철마는 달리고 싶다" 철도 중단점 표시가 있었다.

 

 

 

 

 

 

 

창동역(1984.11.17.~1986.10.15.)

 

 

↘ 지하철 4호선 1단계 개통기념 승차권(1985. 4. 20)

     당시 지하철 고가는 지하철 창동역, 지상에는 국철 창동역이 있었다. 내가 84년에 부임하였을 때는 옛 역사를 쓰고

85년도에 새로 지운 건물로 이전. 당시 지하철 창동역장은 최규하 전 대통령의 생질.

상계역에서 삼선교 (한성대역)까지 개통하였다.  넉 달 후 (1985. 8. 22)  성북역에서 창동역까지 1호선 전철이 연장 운행을 개시. 

 

 

 

 

↘ 동료 이붕래와 수락산 산행 중 (바지는 철도 작업복, 신발은 창이 엷은 운동화를 신고 처음으로 수락산을 올랐다)

노원역에서 내려 들머리를 잡고 상계역으로 내려왔다.  창동역의 추억이 담긴 사진은 달랑  한 장 뿐이다.  1986. 10

 

 

당시 수락산에서 만난 산객이 하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수락산은 마사토가 많은 산인데 신발이 미끄러워 위험하다고. 당시 그 산객은 일 년에 철마다 설악산을 다녀온다고 하였으니 노련한 산객이다. 그 분과 상계역으로 내려와 맥주로 피로를 풀고 집으로 온 기억이 새롭다.

 

 

 

 

1984년 11월 17일 창동역에 부임을 하였을 당시는 전철 연장(성북 - 창동)으로  주위가 어수선하였다, 특히 하룻밤을 자고 나면 선로의 모양이 바뀌어 헷갈리었다. (당시 선로는 철야작업)

당시는 창동역 주위가 온통 쓰레기더미였는데 그것을 고르는 작업으로 11월 인데도  파리가 얼마나 많이 날아다니는지 애를 먹으며 근무하였다. 국철 승강장도 임시 승강장을 사용하고 전철이 개통되었는데도 성북역에서 출발하는 경원선 여객을 위하여 유지.

나는 매표업무가 아닌 수송업무(입환작업)를 하였는데, 주 고객은 쌍용양회, 삼풍제지, 연탄공장, 국제제지였다.

국제제지는 직원들을 위하여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매장에서 팔았는데, 우리 직원들도 그 가격에 구입을 종종 하였다, 삼풍제지는 화물입환을 하려고 들어가면, 야적장에 널려있는 미국잡지를 가져오던 추억이 새롭다. 무엇보다 경악한 것은 구 건물에 있을 때 겨울 아침에는 씻을 곳이 마땅치 않아 연탄공장에서 목욕을 하였는데, 세숫대야까지 온통 시커먼 상태에서 그것을 사용하였는데 얼마나 고마웠는지. 정거장에는 뜨거운 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출은 나의 뜻과 상관없이 청량리역에 근무하시던 분이 자신의 직책이 없어지므로 자연히 편안하다고 소문이 난 창동역으로 찍어서 전입을 함으로써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