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지/2011年 산행일지

봉산, 서오릉

一切無 2011. 12. 14. 12:13

일시 : 2011. 12. 09. 금요일. 맑음

인원 : 일체무, 감꽃

         입술, 은주, 을영, 가을산, 스완, 아름, 의수, 비바, 설유화, 행운별, 뚜벅, 이지스,

         왈츠, 똘똘이, 스나이퍼, 이혜영

코스 :  

- 6호선 구산역 3번 출구 밖

- 황금절 수국사

- 봉산 정상

- 옥천약수

- 서오릉

 

 

봉산 산정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경치는 우리나라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고보니 서울은 깊네요. 이번 12월 3일에 새로 조성된 봉산 해맞이 공원에서 서울의 풍광을 감상하고,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의 왕과 그들의 여인들이 잠드신 서오릉을 아띠의 님들과 걸으려고 합니다. 그나저나 왕의 여인들이여! 살아 생전 행복하셨나요?   

이렇게 방을 붙였는데, 정작 해맞이 공원은 12월24일까지 공원을 조성하는 것이다.. 내가 착각을 한 것이다. 12월2일까지는 해맞이 오름길 조성인데. 그러고보니 나는 뻥을 때린 것이다. 올 겨울을 맞이하여 제일로 추운 날씨에 봉산 해맞이 공원을 보러 오신 아띠님들에게 미안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세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덕종(의경세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다는 수국사. 현재는 옛날 모습 대신 황금법당이 화려하게 들어서 있다. 황금칠은 내가 구산동으로 이사오던 해에 칠하였으니, 벌써 10년이 넘었구나.

약수터에서 좌측으로

새로 조성된 칡재 오름길

 

봉산 정상에 조성중인 해맞이공원, 12월 24일까지 조성을 완료하고, 다음날에 주민을 맞는다.

 

 

수색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서부병원과 덕산샘으로 갈라지는 안부사거리. 이곳에서 우측 덕산샘으로 내려서다 바로 우측 조붓한 오솔길로 길을 걷는다.

 

옥천약수 위 공터에서 먹는 즐거움을 누리고

 

▲ 옥천약수터   

벌고개에는 두 곳의 방호벽이 있는데, 서오릉 근처에 있는 방호벽

 

 

 

 

 

 

 

 

 

 

 

▲순창원  

명종(1545-1567)의 원자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묘소이다. 순회세자는 명종 1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에 승하했고, 공회빈 윤씨는 윤옥의 딸로서 선조 25년 (1592년) 3월 3일 승하했다

 

 

 

 

▲경릉 (위 덕종, 아래 소혜왕후)

덕종(추존)과 비 소혜왕후(추존) 한씨의 능이다. 덕종은 세조의 원자로 태어났으나 20세에 돌아가시고(1457) 뒤에 그의 아들 성종이 즉위 하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 한씨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로서 월산대군과 성종형제를 두었으나 성종이 즉위한 뒤 왕비로 추존되면서 소혜왕후라 일컫게 되었다.

유일하게 조선왕릉중 왕과 왕비의 능의 배치가 바뀌었다. 왼쪽이 소혜왕후 능이고, 오른쪽이 덕종의 능이다

 

▲대빈묘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禧嬪, ?~1701) 장씨의 묘이다. 희빈 장씨는 어려서 나인으로 궁에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1688년 왕자 윤(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숙종이 송시열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윤을 원자로 책봉함에 따라 내명부 정1품 희빈에 올랐다. 그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었고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1694년 서인들의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계기로 남인이 옥사를 일으켰으나 숙종이 오히려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을 재집권시킨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그해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다. 1701년 민비가 병으로 죽자,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아 사약을 받았다. 숙종은 이후 빈을 비로 승격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원래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장사지냈는데, 1969년 이곳으로 옮겼다.

▲홍릉 

조선 21대 영조(1694-1776)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1692-1757)능이다. 정성왕후는 1704년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과 혼인했고, 병약하고 후사가 없던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하자 왕비에 올랐다.
영조는 왕비의 행장기(行狀記)에서 정성왕후가 43년의 왕궁생활 동안 늘 미소 띤 얼굴로 맞아주고, 윗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생모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시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고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묏자리를 정하면서 능 오른쪽(바라보아 왼쪽)을 자신의 자리로 잡아놓으면서 쌍릉으로 예상하여 배치해놓았으나 영조 승하 후 정조는 영조의 능을 완전한 길지라고 주장하는 지금의 원릉 자리(동구릉)에 정했으므로 홍릉은 이처럼 한 쪽에 빈 채로 남아 있다.
영조가 원래 자신의 자리로 정해놓았던 자리는 비어 있고(우허제右虛制) 그 앞으로 석물이 놓여 있다.

 

▲창릉

8대 예종(睿宗, 1450~69)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1498) 한씨의 능이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19세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불과 14개월의 짧은 재위기간 동안 남이(南怡)의 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치적 격동을 겪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은 세조의 승하를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세조 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1469년 승하했다.
안순왕후는 장순왕후의 뒤를 이어 세자빈이 되었다. 창릉은 동원이강의 형식을 이루고 있으며, 석물의 배치는『국조오례의』의 예에 따랐다. 왼쪽이 예종릉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인순왕후릉이다.  

 

 

 

 

 

 

 

 

익릉

숙종의 원비 인경황후 김씨(1661-1680)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서 현종 12년(1671)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숙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 6년(1680) 경희궁에서 20세에 승하하였다. 

 

 

 

 

 

 

 

▲명릉

숙종(1674-1720)과 그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제 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쌍분으로 되고 인원왕후의 능은 옆에 따로 있어 같은 언덕에 배치된 형식이다. 숙종은 현종의 아들로 태어나 현종8년(1677) 세자로 책봉되었고 예론이 한창 일어나 장희빈을 중심으로 한때 인현왕후 민씨를 몰아낸 사건을 겪었으나,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등 업적을 남겼다. 인현왕후 민씨(1667-1701)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태어나 숙종 7년에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숙종 15년 왕자 균(뒤의 경종) 책봉 문제에 장희빈의 무고로 폐위당하였으나, 후에 장희빈이 몰락하면서 복위된(1694)뒤 35세로 승하하였다

 

 

 

앞으로는 제대로 길을 걸어야 겠다.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