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구산에 올랐다. 산정에서 내려와 운동기구 터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아내이다. 오늘은 술을 먹지 말고 집에 있으란다. 꿈에 장모님이 보이시더니, 오늘 가시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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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 향년 92세로 미사강변 요양병원에서 2021. 12. 4. 토요일 21시 44분에 별세하다. 직접 사인은 심근경색 의중이다. 2016년 3월 5일에 신장염으로 강동경희대 병원에 입원을 하시고부터 장모님의 병세는 차도가 없으시고 악화되어 요양병원에서 계셔야만 하였다. 그간 사위는 장모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였지, 장모님에게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였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로 인하여 2년 동안 찾아뵙지 못하는 불효를 하였다.
1.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2. 견딜 수가 없도록 외로워도 슬퍼도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만 한다고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달래어 가면서
비탈진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장모님의 애창곡 18번 여자의 일생이다. 노랫말처럼 장모님은 세상에 소풍을 오셔서 굴곡진 삶을 사시다 하늘로 올라가셨다. 장모님은 1930년 음력 9월 24일 안양읍 호계리에서 전주 이 씨 맏딸로 태어나, 전주 최 씨 윤자 규자에게 시집을 오셔서 아들과 딸 넷을 슬하에 두셨다.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모진 고생을 하시며 자녀들을 성장시키고, 다 익은 곶감을 자시 지도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두 줄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며, 목이 멘다.
장모님과의 인연은 당신의 셋째 따님과 혼인을 하면서 닿았다. 혼인 전 1988년 12월에 암사동 집에서 처음으로 뵙고, 이듬해 1월 28일에 영등포 한일예식장에서 혼인식을 올리며 본격적 인연을 맺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34년이라는 세월이 꿈결같이 흘렀다. 34년이라는 세월이 짧다면 짧은 세월이요, 길 다면 긴 세월이다. 그러니 나보다 함께한 세월이 많으신 장인어른과 형제자매들의 비통한 심정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가 있으리오.
그리운 가슴은 눈물에 젖어 애달피 울어봐도 만날 수 없는 장모님. 연암의 아래 시를 읊조리며 보내 드린다.
떠나는 이 정녕코 다시 오마 기약해도
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을 적시거늘
이 외 배 지금 가면 어느 돌아올꼬
보내는 자 쓸쓸히 강가에서 돌아가네.
↘강동 경희대병원 장례식장 25호실(지하 2층)에 빈소를 마련하고 조문을 받음.
↘12월 6일 9시 30분 발인.
장인어른의 마지막 곡. "여보오! 마지막이오 안녕히 가시오"로 발인을 끝내고,
성남시 장례문화사업소로 운구를 이동하여 8호기에서 화장. 수습된 수골을 유골함에 담아,
여주시 강천면 강천리 165-1 선산 납골묘에 안치.
↘ 12월 8일 삼우제를 올리고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모님이 생전에 가셨던 여주 신륵사에 들렀다.
↘ 강월헌과 삼층석탑 그리고 여강
↘ 다층전탑
↘ 600년 된 보호수 은행나무와 참나무을 배경으로
↘ 600년 된 보호수 향나무
↘ 신륵사 은행나무로 이동
↘ 신륵사 은행나무 관세음보살
↘ 600년 된 보호수 은행나무와 참나무을 배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