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관상가는 세수조차도 하지 않은 본래의 얼굴을 보고자 한다고 들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은 관상가는 뒷모습을 눈여겨본다고 했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성춘향더러 "뒤로 돌아서라, 뒤태를 보자."고 하는데 세태가 변하면서 앞모습만 강조되는 현실이다. 사실 내용보다도 겉포장이 중시되고, 실속보다도 이름값을 들추어 따지는 세상에서 뒷모습 예찬을 나서는 나에 대해 스스로 연민을 금할 수가 없다. 이제는 도시건 지방이건 어지간하면 군중을 실감할 수 있다. 옛날에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다지만 지금은 거리에서, 차 속에서 맨살끼리 부딪치는 것도 다반사이고, 이것을 인연으로 생각할 사람은 억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앞에 나타난 얼굴을 곁눈질이라도 하다 눈이 부딪쳐 뺨에 꽃물이 번지던 시절은 이미 풍속 박물관용이 되어 버렸다. 정면으로 대하게 돼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눈싸움이라도 하는 양 좀체 비키려 하지 않는 현대인들. 차라리 나같이 소심한 사람은 행인들의 뒷모습에다 부담을 느끼지 않고 오래오래 바라본다.
정류장에서, 지하철에서 그리고 길을 가면서 앞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혼자만의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나만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지난 2월 어느 날이었다. 또박또박 걸어가는 앞 선 여인의 발걸음이 그렇게 곧을 수가 없었다. 앞에서 사람이 충돌할 듯 마주 오면 투우사처럼 한 걸음 옆으로 비켜나서 걷는 것도 앙증스러워 보였다. 전철을 기다리는 시간에는 책을 꺼내어 보았고 전철 속의 사람 틈을 비집고 들어갈 때는 연신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시했다. 그러나 내가 정작 감동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추운 겨울 아침의 전철 창은 성에가 가득하게 마련이다. 그럴 때의 대개의 사람들은 무심하지만 더러는 손길이 닿는 부분을 빼꼼히 닦아서 자기 한 사람이 족할 만큼의 창 밖 풍경을 내다보곤 한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핸드백에서 휴지를 꺼내더니 유리창 전체의 성에를 다 닦아 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여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성인들의 초상화에서 보는 후광이란 바로 이런 데서 생기는 것이겠구나 하고 깨달은 적이 있었다.
나는 간혹 우스갯소리로, 우리 집 장롱의 상흔을 헤아려 보면 우리 집이 이사 다닌 횟수를 알아 낼 수가 있다고 말하곤 한다. 상도동에서 수유리로, 수유리에서만도 3번, 태릉으로, 그리고 수원으로. 그동안에 딱 한번 전 주인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나한테 아주 소중히 보관돼 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에 선생님이 이사해 오신 그 집에서 7년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날 사정상 선생님 댁이 오시기 전에 저희가 떠난 관계로 서로 상면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펜을 든 것은 그 집에서 살아 본 사람으로서 일러 드리고 싶은 두어 가지가 생각나서입니다. 먼저 경미한 일이었고 수리도 곧바로 했었습니다만, 혹시 또 모르니 가구를 들여 놓기 전에 한 번 더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쩌다 부엌 하구구가 막힐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부엌 위치상 하수도 배관이 휘어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럴 땐 부엌 뒤꼍에 있는 작은 돌무더기를 헤치고 뚫으면 큰 힘이 들지 않습니다. 옆에서 집사람이 또 하나 더하는군요. 아주머니께서 찬거리를 사실 때는 골목시장의 끝에서 두 번째 있는 할머니 가게에서 사는 것이 싸고 맛있다 합니다. 특히 그 할머니는 부모 없는 오뉘를 공부시키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분이라 하는군요. 그럼 선생님 댁에 두루 편안하시고 즐거운 나날이기를 기도드리면서 이만 줄입니다.
자연을 보고 있자면 시작도 물론 아름답다. 먼동이 터 오는 아침, 봄날의 여린 새싹들, 어린 새들의 재롱. 그러나 자연의 아름다운 뒷모습은 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해질 무렵의 저녁노을, 저 불붙는 듯 화려한 낙엽들. 새들도 죽을 때 우는 울음이 가장 빼어나다 하지 않던가. 뒷모습은 곧 그 사람의 성숙도를 나타낸다. 이 지구를 다녀 간 뒤에 성인으로 추앙받는 분들을 보라. 어디 뒤끝이 상큼하지 않은 이가 있는가. 근자에 우리 주변에서는 어떤 분의 특별 강연 내용이 흘러나와 쓴웃음을 웃게 하였다. 한때 '빽' 그 자체였고, '힘' 그 모체였었던 분이 "빽도 없고 힘도 없어 억울하노라"는 넋두리와 함께 "분한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아 밤중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고 했다던가.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카터는 고향에서 목수일을 익혀 이웃집들 수리하는 일을 돕고 있다는 외신을 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의 실체는 정작 본인이 떠난 다음에 그가 머문 자리에서 운명처럼 향기처럼 남는 것이다.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이들의 이웃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