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24. 05. 13. 월요일. 맑음
남에게 지나친 기대를 주면서 나서는 것은 금물이다.
유명한 것들이 대개 다 불행해지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들에 대해 갖는
지나친 상상을 유명한 것이 뒤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지혜" 에서
↘ 주산지를 가려고 숙소(청송자연휴양림)를 나서며
↘ 주산지 입구에서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입구로 가는 길에 청송사과를 파시는 분들이 있다. 나오는 길에 청송사과 구입.
주산지는 조선 숙종 1720년에 착공, 땅을 파고 그 주위에 둑을 쌓아 경종 1721년에 완공했다.
주왕산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해 있다. 주왕산 산 위에 위치해 있어 기온이 서늘하여 이 근처 얼음골이라는 지역에서는 사과농사를 짓기도 한다. 얼음골에서 약수를 떠가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주산지를 기점으로 주왕산을 등산하는 등산객들도 많이 볼 수 있으며 기암절벽, 제3폭포 등이 유명하다. 사계절 내내 언제와도 풍경이 좋다고 유명하다. 과거에는 주산지 너머 더 갈 수도 있었으나 자연보호를 이유로 주산지 이후 구간은 출입이 금지되었다.
↘ 주산지 축조에 공이 큰 이진표를 기리는 송덕비
↘ 물에 잠긴 왕버들
↘ 다람쥐, 사람의 손을 많이 탔나보다.
우리나라의 엉치뼈 쯤에 해당하는 주왕산은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태백산맥을 타고 내려오면서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두타산, 태백산을 지나 남으로 내려가다가 경상북도 동부의 중앙인 청송군 부동면에 만들어 놓은 명산이다. 낙동정맥의 중간에 위치한 주왕산은 청송군과 영덕군에 걸쳐 있는 진산으로, 북으로는 멀리 영양의 일월산(1,128m), 남으로는 영천의 보현산(1,124m)이 있을 뿐 주변에는 이렇다 할 높이의 산지가 없어서 산세가 더욱 웅장하고 험준하게 보인다. 특히 주왕산 일대의 암봉들과 기암절벽은 웅장하면서도 수려한 경관으로 일찍이 조선팔경의 제6경으로 꼽힐 만큼 뛰어난 지형경관을 자랑하였다.
↘ 주왕산 들머리에서
↘ 대전사에서 기암을 배경으로
↘ 기암교를 건너
↘ 아들바위에서
↘ 주왕암 방면으로(자하교를 건너)
↘ 무장굴에서
↘ 주왕암
↘ 주왕굴
↘ 주왕암에서 우측 오솔길로 가면 병풍바위 전망대가 나온다.
우측 급수대
급수대(級水臺)의 유래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37대 왕인 선덕왕이 후손이 없어 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을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대신들의 반대로 왕위를 양보하고 주왕산으로 피신하여 대궐을 건립하였다. 그 당시 산 위에 샘이 없어 계곡의 물을 퍼 올려 식수로 사용하여, 이곳을 급수대라 부르게 되었다.
↘ 주왕산의 백미, 용추협곡
↘ 절구폭포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 용연폭포 상단
↘ 용연폭포 하단에서
↘ 요추폭포 상부에서
↘ 시루봉
시루봉은 그 생김새가 떡을 찌는 시루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 아들바위에 얹은 아내의 돌(정중앙). 엎드려 가랑이 사이로 던져야 하는데 중간에 난간이 있어
결코 쉽지 않다. 내공이 대단하다. 설마 하여 던지는 장면을 촬영하지 않았는데 한 번에..
↘ 좋은식당에서 십원빵을 구입하여
↘ 달기약수 상탕에서
집에 가는 길목에 있는 달기약수에 들러 약수물을 담아 갔다. 평일이고 시간이 오후라 상탕에는 사람들이 없다.
보통 하탕에 많이 모여드는데 골짜기를 올라감에 따라 신탕·중탕·상탕이 있다. 달기약수의 유래는 조선 철종 때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지낸 권성하(權成夏)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곳 부곡리에 살면서, 동리사람들을 모아 수리공사를 하다가 바위틈에서 솟아오르는 약물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이상한 물을 보고 얼른 약수임을 알고 물맛을 보았더니 트림이 나오고 뱃속이 편안하였다고 한다. 이후 위장이 불편한 사람들이 애용하기 시작하여 약수터로 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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