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동이 일지

[은동이, 15주 차] 누나 친구와 산책하다. 가출하다. 활발하게 사고를 친다. 소갈비뼈가 걸리다. 식분증이 있다.

一切無 2015. 12. 31. 20:05


2015년 12월 26일


  누나 친구가 놀러와 은동이와 함께 예일여고 산책을 하였다. 주인 친구도 반겼다고 하는데, 아직 주인에 대한 의식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산책 중 캔 뚜껑을 주워 먹었다. 자기보다 훨씬 큰 삽살개를 향해 짖어 댔다.




2015년 12월 27일


  한파를 피하고 정서 안정을 위해서도 신발장에서 다시 재웠다. 처음왔을 때처럼 낑낑대지 않고 조용히 잔다. 가끔 낑낑대거나 킁킁 짖을 때 현관을 열어주면, 화단에 오줌을 누러 부리나케 내려간다.




2015년 12월 28일


  오전 11시께 나가보니 강아지가 마당에 없다. 다급히 아빠를 불러 집 주위를 둘러보니 뒷마당에도, 평소 자주 산책을 나가곤 했던 집 앞 주택 그 어느 곳에서도 은동이가 보이질 않았다. 주택을 조금 더 빙 둘러보고 나오니 집 옆 공사장에서 은동이를 찾았다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강아지가 모닥불을 지펴놓은 곳 구석에서 얌전히 앉아 있었다는 인부들의 증언과 더불어, 아빠가 개이름을 불러대어도 은동이가 가만히 있었다는 민망함도 함께 전해 왔다. 나를 보고 나서야 은동이가 공사장을 벗어나 도로변의 내게로 뛰어왔다. 안도감도 있었지만, 아빠에겐 실망감 또한 컸을 터이다.

  공사 때문에 허물어진 담벼락으로 떨어졌을지 혹은 제 발로 내려갔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다만 담을 허물게 내두었다고 엄마한테 구박 또한 맞고 계셨던 터에, 오늘 은동이 마저 그 사이로 가출을 해버리게 된 셈이었다. 거듭되고 있던 아내와 아들의 타박에 못이겨 아빠는 임시 가림막을 정비하려고 하시다 떨어진 쇳파이프에 맞아 큰 사고 또한 당할 뻔 하셨다. 여러 모로 아빠와 은동이가 멀어졌고, 앞으로도 그 거리는 더욱 멀어질 것만 같다.




2015년 12월 29일


  은동이가 아빠 눈 밖에 나버려 걱정이다. 은동이가 현관에서 집 안으로 뛰어들어와 버릴 때마다, 아빠의 표정에 짜증섞인 감정이 깊게 나타나기 일쑤였다. 오늘은 은동이가 아랫집으로 들어가는 케이블선을 살짝 긁어 놓은 것을 발견하여 더 단단히 화가 나셨을 것만 같다.

  누나는 은동이가 금동이 마냥 버려질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나 또한 금동이에게 못 해주던 미안함 때문에 은동이와는 열심히 놀아주고 있는데, 은동이는 그 마음도 모르고 왜 이리도 활발하게 사고를 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개를 또 키우게 된다면, 어울리는 성격의 반려견과 함께하는 것 또한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2015년 12월 30일


  외출할 때 은동이가 달라붙는게 싫어서 아빠한테 은동이를 잡고 있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아빠는 한 손에는 죽도를, 다른 손에는 빗자루를 움켜쥐신채로 여김없이 계단 위로 올라오는 은동이를 몰아내시는 데 성공하셨다. 은동이를 피해 재빨리 대문 밖으로 도망가니, 대문 안에서는 아빠가 은동이를 보며 웃어대셨다. 제 분을 삭이지 못한 은동이가 제 발을 입에 집어넣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급한 전화가 울린 것은 버스가 이미 종로로 들어섰을 때였다. 은동이가 제 분을 못 이기고 혀가 꼬부라져 버려, 사료를 한 알도 먹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개가 갑자기 돌아버렸다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조차 모르겠는 상황에, 비까지 내리고 있어 아빠 혼자 동물병원에 가기에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었다. 결국에는 광화문에서 퇴근한 누나가 서둘러 집에 도착하여 은동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데려갔다.

  어쩌면 그간 은동이에게 못되게 군 아빠가 죄책감을 느낄만한 검사 결과를 내심 기대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준 소갈비뼈를 먹다가 뼈가 이빨에 걸려버렸다는 검사 결과를 누나로부터 듣게 되었을 때에는, 아까 전화하실 때의 다급함은 잊으신채 다시 의기양양해 하실 아빠의 모습에 웃음이 새어나왔기 때문이다.

  은동이는 동물병원에서 뼈를 빼고 항생제 3일치를 처방받았다. 자기도 아까 자신의 모습이 창피했는지 현관에서 고개도 못들고 있었고, 아빠와 엄마는 그런 은동이를 놀렸다. 가루로 된 약도 맛있게 흡입하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2015년 12월 31일

  식분증이 있다. 똥을 누고나서 똥 끝을 잘라먹는다거나, 이미 굳은 똥을 이리저리 옮긴다. 똥을 먹을 때 잡으려고 쫓아가니 장난노는 줄 알고 오히려 신나게 도망간다. 이후 마당을 뱅글뱅글 돌며 도망다니는 술래잡기 놀이가 되어버린다. 한해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어쩌면 그간 은동이는 똥먹은 입으로 나를 정성스럽게 핥아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