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21. 10. 23. 토요일. 맑음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추존왕)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세종 즉위년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 명륜당 관람을 마치고 창경궁으로 이동. 홍화문으로 들어와 옥천교에서 명전문을 배경으로
1484년(성종 15)에 건립된 것으로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하여 옥천교라 하였다. 응봉산의 명당수가 창덕궁의 존덕정을 지나 창경궁의 북쪽 춘당지를 거쳐 옥천교로 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 명전문에서 명륜당을 배경으로
명정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正殿)으로,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이다. 인종이 1544년(중종 39)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1759년(영조 35) 6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또는 가례(嘉禮))가 치러지기도 했다.
↘ 명전전에서 명전문을 배경으로
↘ 빈양문에서
명정전 뒤쪽에는 빈양문이 있는데, 이 문은 국왕의 공적 공간인 명정전과 사적 공간인 내전을 연결하는 문이다.
빈양(賓陽)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뜻으로, 밝음인 양은 국왕을 상징하기도 한다
↘ 숭문당과 문정전을 배경으로
↘ 산사나무와 열매
↘ 숭문당과 문정전을 배경으로
↘ 광정문에서
↘ 화화나무에서
회화나무는 궁궐에서 즐겨심던 나무로 선비의 집이나 서원, 사찰 같은 곳에서도 많이 심었다. 회화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가 많이 난나고 믿었다.
↘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국왕이 관리들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었다.
이곳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하고 서인으로 폐한 곳이기도 하다. 그 후 뒤주는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 안뜰로 옮겨졌고, 사도세자는 8일 동안 굶주림과 더위에 신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 문정전 옆
↘ 문정전 뒤
↘ 다시 빈양문에서
↘ 함인전을 배경으로
함인정은 국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으며, 영조가 문·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19세기 궁궐기록화인 <동궐도> 에는 지금과 달리 삼면이 막혀 있다.
↘ 통명전(좌측) 우측(양화당)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통명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통명전의 백당나무 열매
↘ 창덕궁(후원) 연결 입구에서
↘ 남산을 배경으로
↘ 풍기대에서
↘ 춘당지에서
↘ 팔각칠층석탑
이 탑은 일제 강점기 이왕가박물관을 만들 때 만주(滿洲)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라마식 탑으로 중국 명나라(1470년)때 만들어졌다는 글귀가 탑신에 들어있다. 기단은 사각형의 지대석과 팔각의 2중 기단으로 되어 있다.
↘ 대온실에서
1909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대온실은 창덕궁에 거처하는 순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이 창덕궁에 인접한 창경궁내에 동물원과 함께 지었다
↘ 극락조 꽃
돌출되어 있는 창경궁 대 온실 정문 현관에 신비로운 극락조 꽃이 놓여 있다. 극락조 새를 닮아서 극락조화라 한다. 코로나로 통제되어 문에서 바라만 보는 아쉬움을.
↘ 창경궁 백송(수령은 약 130년)
창경궁 백송은 3그루가 있다. 백송은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희귀한 소나무이다.
↘ 명전문에서 홍화문을 배경으로
↘ 명전전을 배경으로
↘ 홍화문을 나와서
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弘化)는‘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 8)에 재건된 건물이다.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에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고,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 라는 기록화에 그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창경궁은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때, 결혼하기 전 집사람, 부모님 모시고 가족들과 22년 전에 들러보고 오늘에야 딸내미와 동행하여 관람하였다. 동행해 준 딸내미! 고마워, 사랑한다.
'가족이야기 > 2021年(辛丑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산 둘레길(단풍) (0) | 2021.11.15 |
---|---|
한진포구 (0) | 2021.11.09 |
명륜당 은행나무 (0) | 2021.10.24 |
창덕궁 (0) | 2021.09.24 |
송편 (0) | 2021.09.21 |